오늘날 우리는 매일같이 패션모델 이미지들을 접하며 산다. 이들의 외양은 미에 관한 엄격한 규범적 약호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외양이 어딘가 부족하기 때문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게끔 유혹하는 오늘날의 영상문화는 화장품, 성형수술, 다이어트, 운동 프로그램, 이미지 관리 등의 문화적 실천과 맞물려 작동한다. 남성들 역시 점차 비슷한 상황으로 나아간다. 버거의 '행동하는 남성과 보여지는 여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문화 속 전통적인 성 역할은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 여성들은 어떻게 생겼는지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지에 의해서도 사회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반면 남성들은, 한때 여성에게만 적용되던 외양 관리의 약호를 따르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20세기 광고 속의 남성 모델들은 비록 응시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잘 단련된 근육과 능동적인 포즈로 '행동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성 광고 모델들 역시 전형적인 여성적 포즈로 간주되던 자세나 몸짓을 자주 취한다.
실제로 이미지에 대한 관습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이미지 속의 전형적인 남성적 응시라는 개념 역시 재조명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남성적 응시의 이론적 개념은 여성 관객의 쾌락이나 남성들도 응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멀비는 1981년 에세이에서 시각적 즐거움에 관한 내용을 수정하기도 했는데, 여전히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에게 프로이트나 라캉의 성적 분화 이론은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앤 역시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을 통해 1940년대 '최루성 영화(weepies)'로도 알려진 여성 영화의 관객성을 이론화한 바 있다.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성적인 응시의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으며 관객들은 서로 '다른(wrong)' 성의 위치에서 환상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여성은 남성적 응시로서의 관음증을 동일시할 수 있으며 남성 역시 성적인 쾌락이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례로 다음 사진에 나온 1953년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한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배우인 제인 러셀은 카메라 응시의 대상인 동시에 스포츠맨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러셀을 바라보는 사진 속 남자들 또한 관객들에게는 응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적 쾌락은 성별의 분화를 초월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현대 영화들은 남성적 응시라는 전형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에 여성적 응시도 또다른 시각적 쾌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91년에 만들어진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도 역시 이러한 전형적인 응시의 개념이 파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라보기의 권력관계가 복합적으로 함축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두 여자 주인공이 함께 사진을 촬영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주인공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카메라를 통제하고 있으며 여성이 응시의 대상이라는 지배적인 시각을 깨뜨리고 있다.
이처럼 관객성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 분석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영화 평론가들은 관객성이 어떠한 방식으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형성하며, 영화적 응시는 대량문화(mass culture)의 다른 측면들에서 기능하는 응시와 어떻게 교차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또한 일부 평론가들은 사회과학적 접근법을 통해 관객은 실제 관찰자로 인식되어야 하며 관객들 역시 영화라는 텍스트에 반응하는 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단순히 성별이라는 이원성만으로 그 응시의 개념을 분리할 수 없는 특정한 관객층 (예를 들어 흑인 여성 관객) 사이의 반응과 시각적 쾌락도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문제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제기된 이러한 문제의식은 남성 관객의 위치를 그저 남자들로만 대체할 수 없으며, '남성적 응시' 또한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지배적인 관찰자의 위치는 서로 다른 텍스트로 해독하는 관객에 의해 늘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새롭게 전유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흑인 관찰자가 영화 속 흑인 캐릭터와의 동일시 과정에서 저항 의식을 느끼며 그 텍스트에 저항적 해독을 하는 관객이 될 수 있듯이, 남성적 응시 역시 여성 관객들에 의해 전유되어 시각적 즐거움이나 레즈비언적인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메인은 스튜디오 시대를 지배했던 남성 감독들의 영화와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여성 감독의 역할을 강조한다. 또한 홈런드와 화이트는 응시라는 개념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감독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레즈비언 감독들이 제작한 영화에서 지배적 영화의 응시에 대한 비평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레즈비언 감독들은 여성의 이미지들을 전유하여 영화에서 한꺼번에 재봉합하는데, 이 영화들은 여성과 섹슈얼리티의 재현에 대한 분석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응시의 개념을 전유해 비평과 분석의 도구로 활용하는 또 다른 예로는 에탕 인양의 <베다스 수퍼마마>를 들 수 있다. 이 비디오테이프는 1970년대 흑인영화 장르의 고전인 윌리엄 거들러 감독의 1975년 작 <쉐바, 베이비>와 잭 힐 감독의 1974년 작 <폭시 브라운>을 편집해 레즈비언과 흑인 관객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팸 그리어는 1997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재키 브라운>을 통해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여배우로서의 저력을 다시 한번 과시한 바 있다. 에탕 인양은 1970년대의 이 두 고전에 음성을 삽입하고 이중인화 기법을 사용해 팸 그리어의 캐릭터에 욕망과 환상을 불어넣었다. 영화 비평가인 켈리 한킨에 따르면 <베다스 수퍼마마>는 흑인영화 장르에 성적인 이슈를 개입시킴으로써 흑인 레즈비언의 욕망이라는 시각에서 영화를 분석하게 만든다. 비평적인 분석이 명료하게 표현된 이 필름은 보이스오버나 해설뿐 아니라 이미지 자체를 통해서도 저항적인 해독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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